광화문 주위에 서식하던 4년여간 소소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계절이 바뀔때마다, 교보빌딩에 내걸리는 글판을 보는 것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의 신호등을 건너는 때면 으례 목도하게 되는데 봄과 가을의 글판들이 특히 좋았다. 그 글판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시심이 들기 마련이며, 언제나 시인이 되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에 불을 지피고는 했다.
올해 봄의 글판은 서울에 있지 않은 관계로 채 보지 못했는데, 이웃의 블로그에 가니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내내 마음이 어두웠는데 그 포스트를 통해 다소간의 위안을 얻었다.
사진출처와 글판관련 소개 기사: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0022800090343570&outlink=1
장석남 - 그리운 시냇가
내가 반 웃고
당신이 반 웃고
아기 낳으면
돌멩이 같은 아기 낳으면
그 돌멩이 꽃처럼 피어
깊고 아득한 골짜기로 올라가리라
아무도 그 곳까지 이르진 못하리라
가끔 시냇물에 붉은 꽃이 섞여내려
마을을 환히 적시리라
사람들, 한잠도 자지 못하리
2. 김예슬 선언
김예슬에 대해 오프라인에서는 화제로 삼은 바 있지만, 블로그에서는 입장을 표명한 적 없다. 의견을 피력하기에는 내 세속적 삶이 부끄러웠다. 며칠 전, 선언과 관련하여 김예슬 학생이 책을 냈다고 한다. 전후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이 점만큼은 탐탁치 않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지라도 '그녀의 선언'에 어울릴만한 후속행보는 아니었다. 책을 내야 했다면 어느 정도 시점이 흐른 뒤, 자신이 대학에 몸담지 않고도 얼마나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그런 것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향후 그 책의 수입 대부분이 공익에 쓰여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문제가 된다.
그녀의 선언은 선언만으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글이 또다른 글로 이어질 때, 대체로 가식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현재 이 사회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그러하다. 이론과 실천이 중요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의 출판의도가 내가 가졌던 생각과 상반된 것이었으면 좋겠다.
3. 두 번째 짤방
엊그제 아이스쇼에서 꽃혔던 핀란드의 키이라 코르피가 시구를 했단다. 북유럽은 역시 명불허전이다. -.- 늙어가는 노총각의 춘심이라 생각하고 양해하시기를...
돌이켜보면 삶의 대부분을 불안정이란 녀석과 동거해왔다. 불안정은 나의 친구였고, 애인이었으며, 삶의 동반자였다. 대체로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것을 '행복'이라 가정할 때, 내 삶은 어쩌면 행복과는 다소 동떨어진 행보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행복이란 것은 언제나 개별적인 판단과 잠시간의 심리적 상태에 의존하는 것이라 했을 때 행복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살면서 겪는 불안정의 행태는 각양각색이다.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 그리고 사랑으로 인한 알 수 없는 불안정, 불안정한 경제적 상황, 그리고 끊임없는 자아와의 충돌 등이다. 결국 불안정은 격퇴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안정을 위하여.
이를 위한 수단 역시 각양각색이다. 초기에 진화하는 방식,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 치유하려는 방식,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을 몰아가는 방식. 나는 세 번째 형태의 사람이다. 언제나 내 자신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가는 것이 나만의 방식이자 또한 나만의 치유법이었다. 현실적으로 현명한 방법은 초기 진화 방식이다. 일찍이 이를 인지하여 진압하는 방식은 현실적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나는 늘 그렇지 못했다. 언제나 한 가지 문제점에 직면하면 내 자신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다. 이른바 '바닥론'이라 할 수 있는데 바닥을 치고 나면 치유가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또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이 서서히 치유되고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도리어 그렇지 않은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아니 어쩌면 진정성의 문제로 환언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 나는 진정으로 진실되었노라고 주문을 외는 것이었을지도, 혹은 진정성을 가진 것이라 스스로 최면을 걸었을지도 모른다고.
이 글을 적는 지금에도 나는 조금도 진실되지 않다. 무엇이 나를 진실되게 하지 않는 것인지, 그리고 과연 무엇이 나를 진정으로 진실되게 만들 수 있는 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그리고 알 수 없겠지만 끝내는 알고 싶다. 당신들의 진실은 무엇이고, 감추는 것은 무엇인지. 한낱 글 따위로 감추는 것은 어디까지인지. 나의 블로그를 통해 묻는다. 어디까지 진실인지를. (정말로 진실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한다면 말이다.)
'불안정'은 나를 만든다고 했었다. 하지만 '불안정'은 나를 삭제시키기도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 삶은 아직 엷디 엷다는 것이다.
1. 우선 웬트의 '국제정치의 사회적 이론 : 구성주의'는 근래 백수인 상황인지라 책쇼핑은 좀 자제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대출받아 살짝 보던 책이다. 구입해서 두고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이걸 지르기 위해 평소 잘 안가던 알라딘까지 갔다가 한 달새 신간이 또 그새 쌓이고 있더라는. 깨끗한 책들로 쌓여가지 않길 바라며.
2. 캐나다에서 실천적 지식인으로 대표되는 정치철학자 찰스테일러의 '근대의 사회적 상상'이다. 요즘 관심두고 있는 분야와 겹쳐 구매를 하게 되었다. 새끈한 근대적 이미지를 삽입한 표지가 일단은 인상적이지만, 내용도 흥미로울 것으로 생각 됨.
3. 리민치의 '중국의 부상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종말'이다. 좀 미뤄 읽더라도 사둘 생각이다. 사실 배송이 바로 안되어 다음 구매로 미뤘지만은.
4. 홍콩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중국의 진보지식인 량원다오의 '반편이들의 상식'이다. '반편이'란 용어의 사용에서부터 눈길을 끈다. 목차나 서평만 보고 구매하기엔 좀 성급한 것 같아 서점에 가서 좀 보고 사던지 해야 할 것 같다.
나를 위무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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