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鉴于你的求学心切,我同意向学院推荐录取,学院会讨论一下,请你等正式通知。
3,如果录取,你一定要在今后几年努力学习,进一步提高写作能力。
祝好!
소위 명문대 자부심이 있어 그런지 좀 돌려서 말하는 듯. '讨论‘이란 말도 은근 신경 쓰이고...-.- 그럭저럭 무난하게 한 것 같은데, '感觉还有很大差异'란 문맥에 좀 기분도 상하고 그러함. 내가 예민한 탓인지, 아님 문화적인 차이인지 모르겠군요. 대체적으로는 일단 한 고비는 넘기고, 我只能碰运气了。중국어공부 좀 다시 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는 중. 도움주신 여러분의 후의에 감사드려요.
1.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
음악을 듣거나 영상 등을 볼 때 '일시정지'라는 편리한 기능이 있다.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순간 일시정지할 수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 허나 우리의 삶이나 사랑에는 '일시정지'란 것은 없다. 삶이나 사랑은 붙잡고 싶어도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우리의 마음을 위무하지 않는다.
2. “아저씨 말대로 신분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올라가고 싶었어요. 또 언젠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그 사다리를 죽기살기로 올라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밑에 있겠구나. 결국 못 올라간 사람의 변명이지만...”
지붕뚫고 하이킥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세경'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바로 우리 자신들이었음을 상징하는 대사이다. 올라가려고 해도 올라갈 수 없는 현실, 설령 올라간다 해도 느낄 수 밖에 없는 허탈함.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끝없이 주저하는 우리네 인생. 일찍이 김PD가 밝혔듯이, '빈부의 격차'를 소재로 한 한 소녀의 성장기가 될 것이라 하였다. 만약 준혁이와 세경이의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 시청자들이 공감했을까. 의사를 사랑한 가정부. 아니 가정부를 사랑한 주인집 아들(준혁)과의 연결이었다 하더라도 시트콤은 현실적 막장으로 치닫았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지붕킥은 이런 현실적 조건을 모두 거부하고 '사랑'을 정면에서 다룬 무모함을 보여줬다. 만약 내 가족과 주위의 이야기라면 대체로 이들의 사랑을 부정하지 않겠는가.
3. “지금도 가끔 그런 부질없는 생각해. 그날 병원에 일이 생겨서 나한테 오지 않았더라면. 오더라도 어디선가 1초라도 지체를 했다면... 하필 세경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만났어도 바래다 주지 않았다면...”
언제나 과거의 편린들로 인해 고통받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 그렇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라보지만, 언제나 그렇지 않은 삶의 '의외성'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와 같은 '의외성'과 발가벗은 채로 대면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4. “그래도 마지막에도 이런 순간이 오네요. 아저씨한테 그동안 마음에 담아놓은 말들. 꼭 한 번 마음껏 하고 싶었는데. 이루어져서 행복해요. 앞으로 어떤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늘 지금 이 순간처럼 행복했음 좋겠어요.”
세경, 그녀의 소원대로 되었다. 나도 원했던 것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바랄 것이다. 언제나 지금처럼 행복한 순간을... 그것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고, 또 언제나 오지 않을 수 있고, 시점이 다르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저 앞으로 다가 올 봄처럼 짧다라는 점이다.
5. 인터넷 포털 Daum의 지붕킥 관련 기사에서 "지붕킥, 결말 어떻게 보셨나요?"라는 Poll이 진행중이다.
http://media.daum.net/entertain/view.html?cateid=1032&newsid=20100319202306535&p=newsen
(0시 24분 현재 3808명 참여, 10.03.19 ~ 진행중)
'색다른 마무리에 공감한다'가 666명으로 17.5%, '허무하고 아쉽다'라는 의견에 79.4%(3,024명)의 시청자가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의견보류'에 3.1%(118명)
나는 79.4%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 마음은 이해한다. 이 투표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전히 왜곡된 사회의 모습을 외면하고, 해피엔딩을 바란다. 알면서도 이런 결과를 자초한다는 것에 이해를 표시하면서도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낀다. 개인적인 생각이다. 세경과 준혁의 관계, 지훈과 정음의 관계는 현실의 눈에서 볼 때 '안정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세경은 자신의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현실에 반하는 '고백'을 하고 만다. 그렇게 고백만으로도 '사랑'은 충분할 때가 있다. 반면, 지훈이 진정 사랑하고 설렜던 사람은 누구일까. 시청자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문제지만. 난 결국 세경이었음을 얘기하고 싶다. 두 커플 모두 순조롭게 잘 되는 것을 시청자들은 원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기에 이와같은 불만을 토로하는 것일테고. 사랑은 현실적으로 엇갈리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붕킥의 엔딩은 공감 못할 것도 없다. 이 시트콤은 '이 시대의 사랑'과 '굴절된 이 사회'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남을 것이다.
6. 마지막 장면의 BGM, 레이첼 야마가타(Rachael Yamagata)의 'Duet'
마지막 장면에 흘러나온 곡이다. Oh, Lover, hold on. 'till I come back again. (오. 나의 사랑 그대로 있어줘요.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으로 슬픈 음색과 멜로디로 시작된다. 레인 라몬테인(Ray Lamontagne)이란 가수와 함께 불렀고 그녀의 2집에 이 곡이 담겨져 있다. 하이킥이 '일시정지하'자 음악도 '정지'하였다. 그것은 영원한 정지인지, 그야말로 일시정지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지붕킥의 BGM 역시 매우 훌륭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티비를 통해 버려지는 시간이 참 많은데, 가끔은 버려지지 않는 순간도 있음을 느낀다.
이 글을 그동안 나에게 즐거움과 감수성을 되살려줬던 '지붕뚫고 하이킥'의 많은 제작진과 연기자들, 그리고 함께 공유하였던 또 무엇인가 공유하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바친다.
1. "안토니오 그람시는 비록 강력한 이념(패권)이 몇몇 계급의 사람들을 종속시킬지라도 이에 저항하는 반패권 세력이 항상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와 유사하게 학문적 세계에서도 현실세계와 마찬가지로 주류이론에 도전하는 저항학문의 출현은 피할 수 없는 일인 듯 싶다. 그렇다면 수성(守城)하는 쪽에 설 것인가, 공성(攻城)하는 쪽에 설 것인가. 공격은 곧 저항이고, 저항은 또다른 의미의 공격이다.
2. 대안적 접근법론자들의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근래 드는 생각은 가까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진리'는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연구자들이란 결국 자신의 마음에 드는 패러다임에 손쉽게 줄을 서는(물론 수없는 이론적 검토 또는 실증을 거친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은) 것은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역사사회학 분야의 찰스 틸리가 언급했던 "국가는 전쟁을 만들었지만, 전쟁은 국가를 만들었다."의 논리를 끌어와 주류이론의 패권은 저항에 가담하는 연구자들과의 일전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그 끝없는 공방전은 어쩌면 "권력이 지식을 만들어 낸다"던 푸코의 말처럼 '권력관계'에 다름없을지 모른다. 과연 이러한 권력관계는 사회를 위한 생산적인 행위라 말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3. 몇몇의 권위적 연구자 모델(베버, 칸트, 마르크스, 월츠, 커헤인, 웬트, 월러스틴 등등등)의 논문 내 잦은 등판은 어떤 경우 글의 논리적 조직보다는 연구자 자신이 권위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가짜(?) 권위를 창출해 가는 것에 관심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은 아닐까. 보편적 서구의 담론은 차치하더라도, 한국의 담론은 무엇이 있는가. 정작 우리의 방법론도 없는데 서구의 담론을 가져와 논하는 것은 때로는 무의미하고 공허하게 보인다. "가진 것이 없으니 베끼기라도 해야지"모드도 좋다. 그러나 그동안 많이 묵었다 아이가. 커가는 햇병아리들이야 더 묵어도 된다 하더라도,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한국의 연구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단순히 안정적인 잡을 위한 소위 '스펙 쌓기'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부족하니 더 공부해야겠다는 '헝그리정신'인가. 권력을 향한 간접적 의지의 향연이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4. 무릇 보이는 틈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고, 빈 틈을 메우는 것은 창조적인 작업이라 결코 쉽지 않다는 것에 일정하게 동의한다. 허나 그동안 그만큼 일방적으로 주어진 학문적 수단들을 그대로 가져다 썼으면, 이제는 수단을 제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때가 한참이나 지나지 않았나 싶다. 우격다짐인 감은 있어도 자존감을 지켜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애쓰는 중국의 모습이나 이미 자신들의 것을 많이 만들어 낸 일본의 사례는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권위있는 외국잡지에 영어로 글 싣는 것이 큰 학문적 성과가 되고, 그것이 내실있는 학문적 권위자인 양 비춰지게 만드는 한국 학계의 모순 등은 십분 이해하지만은 아닌 것 아닌 것이다. 아무도 그 많은 오물들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으며, 대충 같이 살자고 말한다. 자본주의처럼 팽창하는 한국의 가짜학문들을 생각하면 가끔 이 길 가야하나 싶다.
2009.3.9. zzacnoon.
퇴직과 출국과 급거 귀국 여파 등으로 푹 쉬다가 도서관 열람실로 출근하기 시작한 지 이제 조금 더 지나면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첫 한 달은 기상시간을 아침 7시로 맞추는 것과, 또 차붓하게 앉아 책을 들여다 보는 연습을 하는데 시간을 들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달이 지나면서 직장 생활 몇 년에도 바뀔 생각을 않던 늦은 기상시각이 상상할 수 없던 시간으로 맞춰지는 것이었다. 아침형 인간도 아닌 것이 이러면 안되는 것인데 말이지. 다음은 책 보는 것도 다시 많이 익숙해지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로 속도가 좀 더디고 속된 말로 효율적이지 못한 것이 좀 답답할 때도 있지만 역시 '공부란 것도 몸으로 하는 것'인지라 지속적으로 참을성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떠벌이가 말로 스트레스를 풀 수 없는 환경에 처했다는 것이 좀 불우한 상황이다. 솔직히 공부보다는 생계중시의 대학원생활을 타파하고, 학문적인 떠벌이로 거듭나기 위해 치르는 댓가 치고는 좀 가혹하긴 하다. 기실 잇단 작년부터 불어닥친 두 세번의 시행착오와 보장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초조함이 더 나를 흔드는 것이긴 하지만은. 뭐 오늘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공부란 걸 하기로 한 이후부터 언제 그렇지 않았던 때도 없었으니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공부 얘기로 잠시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다시 책을 집어 들면서 결정한 것이 이론서들의 경우 천천히 읽되, 독서노트에 중요한 사항들을 필사(筆寫)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루에 서 너장씩 옮겨 적으면서 좋은 것은 책을 한 번에 두 번에 가깝게 읽게 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과, 또 필사를 하면서 한 번 더 여과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다는 장점이 발생한다. 또 이런저런 의구심과 단상들이 떠오를 때는(아직은 아주 가끔이지만) 다른 색상의 펜으로 적어 두기도 한다. 이 노트는 한 두달에 한 번씩 다시 정리하면 생각을 정립하는 데 일정한 도움이 될 듯 싶다. 다만 부작용은 오래도록 컴퓨터의 노예로 거침없이 살아온 내가 손을 혹사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손도 많이 아프고 또한 그냥 봐도 오래 걸릴 이론서들이 필사하는 덕에 한 달에 읽을 수 있는 양도 많지 않다. 그런 것들을 예상해서 6~700페이지 정도의 이론서를 기준으로 한 달에 4~5권 정도만 읽어도 되겠단 생각은 했지만, 여전히 양에 집착하는 버릇을 뜯어 고치지 못한 탓인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번 주 전후로는 중국어 답변도 좀 준비해서 연습 좀 해볼까 한다. 한국어는 그리 떠들어 대면서 한어구어는 왜 그리 하기 싫은지 이것 역시 나를 심란하게 한다. 체계적이지 못한 공부가 좀 더 자리 잡으면 7개월 넘게 듣지 못했던 신곡도 좀 듣고, 애증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는 기타연습도 좀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겠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와(SIWA)의 1집이 드디어 나왔다는데, 제대로 갖춰진 사운드로 듣지 못하고 본인이 직접 올린 것으로 보이는 유튜브 동영상으로 지금은 만족해야 할 듯.
摘要: 감내할 것은 감내하고, 일정하게 낙관적이며, 또 그에 못지 않게 번민하며 살고 있다. 지극히 이기적인 형태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