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무료함이 사라지지 않고 외로움이 깊어진다. 헤어나올 수 있을지. 그의 죽음에 나를 투영하는 가식도 깨닫다. 나는 여전히 서른 다섯의 어린아이.
(나는 노 전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지자도, 반대자도 아님을 밝혀둔다.)
아침 10시경, 나가야 할 일이 있어 씻으며 노트북을 켰다가 포털 메인의 차마 믿을 수 없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TV를 켜니 그 믿을 수 없는 기사의 확인. 밖에 나와 있으면서도 틈틈히 쏟아져 나오는 뉴스를 봤고, 방금 사무실에 잠깐 들어오면서도 특별호외를 읽었다. 먹먹하단 표현으로는 지금의 감정을 모두 표현할 수 없다.
인터넷과 언론의 여파를 익히 알고 있는터라, 또 누군가의 죽음을 화제거리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망설여지기도 했었다. 박연차 게이트 이후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에 대해 이야기했던가. 청와대, 정치권, 그리고 검찰은 검찰대로 정보를 흘리기 바빴고, 언론은 그것을 재생산하였으며, 또 우리 대중들은 확대재생산의 순환을 요구하였다. 일파만파. 나 역시 언론보도들을 보면서 피의자로서의 존엄이 지켜지길 원하면서도 또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에 대한 남은 실날같은 애정 역시 사그라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주위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
우리들의 끝없는 설화(屑話)와 설화(舌禍)는 결국 그를 투신자살로 이끌었고, '낡은 한국정치가 만들어 낸 비극'이라는 외신보도는 사태의 본질을 관통하는 제목이었다. 그의 솔직하고 직선적인 화법에 우리는 역시나 직선적인 지지철회로 돌려 주었고, 그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죽음'으로 답했다. 우리는 모두 고개 숙일 수 밖에 없다.
2002년, 그의 정치실험에 우리는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환호는 잠시였다. 정치개혁의 누적된 피로는 그에 대한 환호를 일순간에 거두게 만들었다. 그러나 과연 모든 것이 그의 탓이었던가. 그 자리가 대통령의 자리였기 때문이었지만 어찌 보면 우리의 인내심이 너무 부족했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온 나라가 어수선할 것임이 자명하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그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깨끗하게 망각할 것이다. 봉하마을과 지금 인터넷에 온통 가득한 부엉이 바위까지 모두 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주류'로 살다 갔지만, "삶과 죽음이 하나가 아니냐."는 유서의 내용은 비주류는 정작 우리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12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엄청난 분량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그가 퇴임 직후 했던 한 마디가 내내 가슴을 친다.
"이 정도면 괜찮은 대통령인데, 국민이 영 눈이 높아 안쳐준다."
그에 대한 애도보다는 당분간 혼자 부끄러워 하며 지내겠다.
이거 보고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우리나라 정서에 맞춰 의역했다는 블로거의 센스가 대단하다. 니가 고생이 많다.ㅎㅎ
1. 정형화된 현상: 중국의 다극화전략과 부상을 두고 갈등과 협력으로 바라보는 정형화된 관점(구조주의와 자유주의)에서 문제의식은 출발했으며, 가설을 통해 중국의 다극화전략이 앞으로 어떤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게 될 것인가란 것에 대한 해답을 찾음과 동시에 기존연구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
2. 가설: 국제관계이론에서는 주로 협력이냐 갈등이냐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중국을 바라볼 때 대체로 갈등 혹은 협력이냐는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갈등이냐 협력이냐의 이분법적 구도로 나누는 것 자체가 합리적 결과도출의 혼란을 가중할 뿐일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조건이 같다면 가장 간단한 해답이 진실에 가깝다는 오컴의 면도날의 준칙을 고려한다면 이 두 가지 모두를 결합하는 것이 더욱 논리적이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전제. 물론 갈등과 협력의 혼재라는 주장들 역시 나타나고 있지만은 중단기적인 전망에 그치고 있다는 한계를 보이고 있음.
3. 근거(데이터): 갈등(구조)과 협력(행위)이 모두 혼재된 상황이라는 데이터들을 조합하여 제시한다. (①중국과 미국, 기타 국가들과의 갈등 및 국제적 문제에서의 갈등 사례, ②국제적 기구 등에서의 협력 사례, ③북핵문제는 현재와 미래에 있어 협력과 갈등의 복합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임을 근거로 제시.)
4. 주장: 미국발 금융위기 등의 변인이 발생하는 등의 과도기적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현실적인 차원에서 중국의 다극화전략은 협력과 의존의 형태를 유지하며 더욱 정교해질 것임이 분명해 보이지만, 제반 조건의 일정한 충족이 이루어진다면 갈등확산의 양상을 띠는 방향으로 전환되면서 전략 자체의 소멸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상식적인 수준의 예측이 가장 간결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학문적 연구경향을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이런 의미에서 중국의 부상여부를 가늠하는 연구행위의 반복은 지극히 소모적이면서도 경제성의 원리를 위배하는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 머리도 식힐 겸 해서 7급 공무원을 간단하게 보고, 바로 이어 박쥐를 봤습니다. 좀 늦게 끝난데다 화장실 들렀다 가느라 한 7분 가량 처음을 보지 못해서 좀 아쉬웠는데요. 11시 무렵에 극장에서 나왔는데 그 잔영이 아직도 남아 있네요. 영화는 각자가 해석하기 나름이기도 하지만, 박찬욱은 어떤 의도를 가졌던 것이었을까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쩌면 간략한 영화평이 될 수도 있겠네요.
전 이 영화가 쾌락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신념'따위는 내던질 수 있는 인간 군상의 추잡한 모습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에서 신념이란 것은 신앙으로 치환이 되고 있지만, 신념이나 신앙, 그리고 작게는 각 개인의 소박한 믿음까지 이 모든 것을 포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영화 속의 캐릭터들이 대체로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이 박찬욱 영화의 특성이겠지만, 전 이것이 일탈하지 않은 인간들의 모습도 크게 다를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곱게 포장되어 있다고 할까. 결국 일상에서 다소 벗어난 인물들을 통해 정상사회의 인간들을 겨냥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
환언하여, 살아온 배경이 달랐던 신부 상현(송강호 분)은 기존의 신앙자였다는 굴레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저는 이제 모든 쾌락을 갈구합니다."란 대사로 철저히 자신의 행동이 모순임을 극적으로 반증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고, 반대로 "이 지옥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고 싶어서요."란 대사를 날렸던 태주(김옥빈 분)는 송강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뱀파이어로 환생하면서부터는 좀 더 적극적인 형태의 행위를 추구합니다. 어찌 보면 송강호는 포장된 형태, 김옥빈은 날 것 그대로의 형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최후는 태주의 폭주를 견디다 못한 상현에 의해 제어되면서 한줌 재로 산화하게 되지요. 이 라스트 씬 역시 '신념'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을 교차시켜주는 듯 했습니다.
한편 조연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상현의 비밀을 공유했던 상현의 시각장애 스승 노신부(박인환)는 사실을 알게 되고, 처음에는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내주는 등 희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나, 결국 뱀파이어의 힘을 빌어 시각장애에서 벗어나 밝은 세상을 보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란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상현에게 간접적인 살인(?)을 당하고 말지요.
상현의 친구이자 태주의 남편으로 나오는 강우(신하균)는 뱀파이어로 변한 이들의 폭주 속에서 이들의 정신을 혼란시키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두 주인공의 쾌락 사이에서도 끼어 들면서 이들에게 원죄라는 굴레를 씌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마다 강우의 집에서 강우의 엄마 라여사(김해숙 분)와 함께 마작을 하며 어울리는 오아시스 멤버(오달수 분, 송영창 분)는 강우의 죽음이 상현과 태주에 의한 것이란 것을 침묵의 라여사를 통해 알게 되면서 바로 태주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죠. 이들이 영화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무시할 수 없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끝까지 이들 뱀파이어 커플을 따라 다니는(?) 라여사의 존재. 침묵하는 타인을 의미하는 듯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을 알면서도 또 움직일 수 있으면서도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침묵합니다. 뱀파이어 커플의 최종을 지켜보는 라여사 역시 영화를 관통합니다.
마지막에는 상현이 밤에 뛰쳐나와 거리를 헤매곤 하던 태주에게 처음 신겨줬던 상현의 신발만이 산화한 재 속에서 남겨집니다. 이 신발의 의미도 생각해 본다면 영화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잔인한 장면에 대박흥행은 하지 못할 것 같지만, 7급공무원을 보면서 '하하하'하면서 아무 생각없이 보는 영화도 필요한 법이지만, "이 영화 뭐가 이러냐." 하면서 짜증내며 영화가 던져주는 화두에 대한 생각을 서둘러 갈무리하는 것도 피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란 결국 삶을 투영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중적인 영화나 매니아적인 영화나 결국 궁극적인 귀결은 유사할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소녀시대의 댄스교실 동영상을 내가 좋아하는 멤버 위주로 올린다. 좋구나~ 꽃남을 좋아하던 여성들 나 이제 다 이해한다. 특히나 불꽃팍팍 러브시카를 보면 쓰러진다.
1. 원기회복 활력태연 - 기운 없고 힘 빠진 누군가를 응원할 때
2. 불꽃팍팍 러브시카 - 사랑을 하려는 누군가를 응원할 때
3. 청춘예찬 패기서현 - 젊음의 패기를 응원할 때
4. 칠전팔기 도전윤아 - 도전을 앞둔 누군가를 응원할 때
5. 심기일전 희망유리 - 좌절하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심어줄 때
6. 위기탈출 재치파니 - 위기의 순간을 재치있게 재치있게 탈출해야 할 때
'선택'이라는 것은 자유의지와의 연관성을 비롯한 다방면의 철학적인 테제들을 안겨준 바 있지만, 굳이 어려운 단어들을 꺼내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든 언제나 이 문제에 직면하고는 한다. 오늘은 또 하나의 작은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패를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같이 공부하는 친구에게 잠시 유선상으로 주절주절 털어놓았던 바가 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다른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도 이런 선택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 친구나 나는 조언이 필요했던 것일까. 어쩌면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는 행위는 한 템포 쉬어가는 형태의 일종의 자기 숨고르기가 아닐까. 저기 저 너머 부유하고 있는 부유물들을 모두 건질 수 없다. 하지만 그 부유물들이 사라지기 전까지 무엇을 고를 것인가란 생각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것이 조언을 구하는 과정이자 선택을 내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뻔한 얘기지만 선택이 때로는 너무 힘든 순간이 있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가슴을 쥐어 뜯으며 통곡하는 이도 있고, 반면에 희열에 차 오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선택의 중요성은 차치하고라도 그 결과의 파장은 예측가능한 범주를 이미 초월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주말에 별세하신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기사들을 몇 토막 읽었다. 평생 목발에 의지해 살면서도 세 차례에 거친 암과의 투쟁. 결국 장영희 선생은 그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나보다 스물 두해를 더해야 하는 쉰 일곱해를 살아오면서 그녀는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해야 했을까. 아마도 그녀나 나나 각자가 살아 온 세월만큼 그 선택의 수량의 차는 그리 많이 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만 그 처한 환경에서 중압감만은 차원이 달랐을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나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나보다 더 무거운 길을 걸어가야 했을 것이고, 그런 길의 수없는 반복은 그녀의 자아를 더 없이 단단하게 만들었을테다.
나는 그녀만큼 씩씩하지도, 단단하지도 못하다. 여전히 내 자아는 한 손에 쥐면 순두부처럼 으스러질만큼 연약할 뿐이다. 그럼에도 순두부라고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그녀가 눈을 감기 전에 완성되었다는 두 번째 에세이집에 나오는 문장으로 끝맺음을 하던 신문기사는 단비가 세차게 내리는 5월 11일 저녁 퇴근길의 나를 더 세차게 뒤흔들었다.
경향신문, 2009년 5월 11일 월요일, 21면 <사람과 사람>中.
결과론적이지만 이 기사로 난 선택이 더 쉬워졌다. 물론 마음 속으로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기도 했지만은... 도입 부분에서 선택은 자유의지와 관련이 있다는 초보적인인 철학적 해답을 언급했었는데 이렇게 수정하고 싶다. "우리의 선택이란 것은 본래 '자유의지'보다는 실존으로서의 '희망' 혹은 '갈구'와 더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